15-01-19 13:36
‘미생’의 사회가 ‘완생’으로 항해해 나가기를
나는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요즘 ‘미생’이라는 드라마를 한 편씩 보고 있습니다. 미생은 바둑에서 쓰는 용어로써 ‘완전히 살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둑은 검은 돌과 흰돌이 서로 집을 만들어서 상대방의 돌을 고립시켜 많은 집을 확보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입니다. 여기서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 바둑을 두는 과정에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상대방에게 잡혀 먹히지 않으려면 홀로 ‘완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완생’을 하려면 ‘두 집’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말의 다른 의미는 ‘한 집’ 또는 ‘한 집 반’만으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미생’이란 용어는 바둑을 두는 과정에서 바둑알이 완전하게 독립적으로 살 수 있기 위한 기준인 ‘두 집’이 완성되기까지의 불완전한 생존의 현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끈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에 ‘완생’이랄 말할 만한 것들이 그렇게 많지 않고 오히려 살아도 살아도 ‘미생’인 삶의 불확실성을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과 너무 닮아서 사람들은 이 드라마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 속에서 살아가는 주인공들을 통해서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아마도 이 드리마가 시청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중요한 메시지는 단지 계약직 사원이 정규직으로 임용되지 못하는 것만이 ‘미생’이 아니라 ‘완생’처럼 보이는 정규직 사원들과 회사의 중역들 역시 ‘완생’의 삶이 아닌 ‘미생’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불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자체가 ‘미생’의 세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는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어린이집 교사 아동학대 사건’을 보면서 정말로 이 세상이 미생의 세상이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보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힘이 없어서 언제든지 회사에서 정리될 수 있는 ‘장그래’같은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이것이 비정규직의 서러움이고 계약직의 서러움입니다. 더불어서 일용직 노동자들은 더욱 처절할 것입니다. 나는 이와 비슷하게 이 사회의 또다른 ‘장그래’를 보게 됩니다. 이 힘없는 사람은 계약직 직원이나 일용직 노동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의 이름은 ‘아동’이고 ‘장애인’이고 ‘어르신이라 불리는 노인’이며, 때로는 세월호에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이들이 가진 특징은 대게 ‘자신들의 결정권보다는 타인에 의해서 도움을 받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린이집 선생님의 돌봄이 있어야 하고, 장애인들은 도우미나 봉사자 또는 국가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좋은 선생님들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들이 제대로되 도움의 손길로부터 소외당하기 시작하면 하루 아침에 ‘미생’의 삶에서 ‘사석(死石)’-죽은 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바둑을 두는 ‘기사’들은 어떻게 해서든 ‘완생’을 추구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경영하는 사람도,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도, 이 세상을 경영하는 사람들도 모두가 죽은 돌인 ‘사석’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미생’과 같은 상태를 어떻게든 완생이 되게 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단지 진짜 성공 ‘완생’이 되느냐 아님 실패한 ‘사석’이 되느냐의 차이는 그 바둑을 두는 ‘기사의 실력’에 달려 있습니다. 바둑으로 따지자면 이번에 인천의 어린이집 교사는 자신이 하는 잘못을 ‘완생’을 향한 한 수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한 수를 잘 못 둠으로 인해서 자신의 인생을 ‘완생이 아닌 죽은 돌’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나라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완생’을 목적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완생’하는 법으로 몰라서 끊임없이 패착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사들도, 복지사들도, 경영자들도, 그리고 국가도, 정부도, 국회의원도, 전문가들도 말입니다. 모두가 말하길 자신이 가진 수는 ‘신의 한 수’라고 믿고 있지만 그 한 수가 이렇게도 불안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노련하지 못한 ‘미숙함’입니다. 결국 미숙한 실수들이 바둑알을 죽이는 ‘사석’을 만들고 있음에 너무나도 가슴이 아픕니다. 나는 미숙한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사회를 경영하는데 참여하고 있는 미숙한 우리 사회와 어른들이 두고 있는 커다란 바둑판에서 희생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이 세상의 바둑판에서 죽은 돌들의 희생인 ‘사석’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 모두가 함께 ‘완생’할 수 있는 절묘한 한 수들이 놓여지기를 간절히 기도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