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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섬김의 평안밀알복지재단
생명의 봉사 · 사랑의 봉사 · 섬김의 봉

 

 

기도편지

 

 

 

12-12-17 00:23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며 살아간 시간을 돌아보면서.....

한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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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은 충남 예산이라는 곳이다. 나는 여느 집 아이들처럼 동네에서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놀며 학교에 다녔고,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특별한 때에 어느 선배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게 되어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 집안은 불교적 배경과 유교적 배경을 동시에 가진 곳이었다. 나는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면서 다른 신앙적인 배경들을 떠났고, 내 삶은 신앙적인 열심으로 채웠다. 하나님이 계신 교회에 가는 것이 좋았고, 그곳에 친구가 있었으며, 그곳에 가면 기도할 수 있어서 마음이 편안했다.
이후 고등학교가 되어 처음에 이과를 선택했던 나는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소명’을 받아서 신학교에 가서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학교에서는 내가 가진 신앙적인 열심히 대학을 진학하는데 방해가 될까봐 걱정하시는 선생님이 계셨지만 나는 이런 걱정과 무관하게 신앙적인 면에 열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부터 ‘이과’를 선택했던 나는 3학년이 되면서 신학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고 ‘문과’시험을 치루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고등학교 3학년 내내 독학으로 문과공부를 하면서 시험시간마다 책상을 들고 문과 반으로 이동하여 시험을 치루는 일을 계속해야만 했다. 이런 신앙적인 경험은 후일에 나의 삶과 가치관, 세계관을 형성해 나가는데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어린 시절 내가 만난 한 명의 친구에 대한 기억이 후일에 나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어린 시절을 보낼 때 우리 동네에는 나와 동갑내기 한 친구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 친구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좀 이상한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 이유는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시절에 그 친구는 초등학교에 다니지 않았고 내가 중학교에 진학하고 난 이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얼마 다니지 않고서는 학교를 그만 두었다. 그리고는 동네에 있는 여자 중학교 누나들과 매일 즐겁게 노는 것을 보고는 너무나 부러워했었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이 친구가 왜 그런지에 대해서 관심도 없었지만 점차 내가 성장해가면서 그 친구는 ‘다운증후군’ 때문에 ‘지적장애’를 가진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학교 안가는 친구가 부러웠지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이 친구는 학교에 안간 것이 아니라 못 간 것이었고, 중학교 누나들과 재미있게 논 것이 아니었고 누나들의 놀림감이 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전혀 상관없는 두 가지 삶의 경험은 시간이 한 참 지나간 이후 나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나는 당시 나의 기도제목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고, 고등학교에서 신학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대학에서의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면서 대학에서 교수님들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린 시절 교회에서 배운 신앙에 대한 지식이 무척 협소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성경에 대해서 알아 가면 갈수록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그 분의 삶은 어떤 것이었는가?’라는 질문을 계속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성경에 대한 고민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복음을 전하시고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삶을 중요하게 여기셨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그 분의 대부분의 삶의 바탕은 가난한자들과 병자들, 고아와 과부들 장애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사람취급 받지 못했던 여성들과 어린 아이과 함께 하시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부끄럽게도 신앙인으로서 하나님께 경배해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예배하는 사람의 삶의 자리가 예수님의 삶의 자리와 벗어나 있다면 그 예배는 가식적인 것이요 삶으로 드리지 못하는 것임을 뒤늦게 알게 됐다.
이렇게 고민하는 와중에서도 나는 3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고향집에 잠시 돌아와 부모님이 해주시는 따듯한 밥을 먹던 시기가 있었다. 잠시 고향에 들러서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어릴 적 친구였던 00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친구가 음성에 있는 꽃동네에 갔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부모가 재산이 있으면 못 들어간다는 소리를 듣고 부모님들이 몰래 가서 아무도 모르게 그곳에 남겨두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잘 몰랐었는데 그동안 이 친구는 가정에서도 형의 폭력에 시달렸었다고 한다. 장애를 가졌기에 농사를 짓는 가정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였고, 실패한 형님이 술만 먹으면 화풀이를 동생에게 해서 결국은 ‘너 시설에 갈래’라는 이야기를 들은 00이는 형이 없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가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정말 마음이 아팠다. 지금도 시골교회에서 그 친구를 붙잡고 기도해주던 일이 가끔 생각나곤 한다.
그 후 나는 군 생활을 마치고 신학교에 돌아온 나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모임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학교 안에서 그런 활동을 하는 단체가 있었는데 그 단체는 ‘한사랑장애인선교회’라는 곳이었다. 나는 이 단체를 만나게 됨으로 예수님이 사셨던 약자들을 위한 삶 중 장애인들을 위한 삶으로 나를 우선 인도하심을 경험했다. 이 동아리 활동을 통해서 신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대전의 장애인특수학교인 원명학교에서 매주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목원대학교 한생들과 우리 동아리 학생들이 연합해서 장애아동을 위한 채플시간에 봉사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장애 친구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것을 조금은 몸으로 체득했다고 해야할까?

내가 왜 이 일을 하게 되었는지는 이미 앞에서 나의 인생의 여정을 통해서 어느 정도 설명을 했다고 본다. 장애인들을 위해서 내가 구체적으로 헌신하게 된 사건을 소개해주고 싶다. 내가 신학생 시절 장애인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장애인과 함께하는 봉사를 하던 동아리에서 어느 날 대전에서 김천으로 M.T를 갔던 적이 있다. 우리 일행은 이 날 저녁 수업을 마치고 밤 기차를 타기 위해서 대전역에 갔고 기차표를 사서 출발하기 전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한쪽 구석에서 조금 소란한 소리들이 들려서 돌아보니 거기에는 더러워진 옷을 입고 얼굴에는 좀 이상한 표정이 맴도는 친구가 있었다. 함께갔던 한 친구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친구는 상습범이야. 그냥 모른체 해.....’ 무슨 소린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설명을 들어보니 이 친구가 우리가 있는 곳에 구걸하러 왔던 모양이었다.
맘씨 착한 친구들은 그 아이가 상습범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콜라 하나와 햄버거 하나를 사 주었다. 그 때 나는 혹시 이 애가 정말 집나온 친구이면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 친구에게 가족에 대해서, 그리고 전화번호와 엄마 이름을 물었다. 생각 외로 이 친구는 자기 이름과 엄마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불러주었다. 공중 전화 부스로 가서 전화를 하니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 추운 날씨라 역 주변의 복지기관을 찾아가서 하소연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 복지기관을 찾아가서 이야기 해보니 이 친구는 장애인이라 자신들이 하는 일과 달라서 도와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우리는 이 친구를 놓아두고 김천 가는 기차를 타게되었다. 그리고 김천에 도착해서 저녁식사를 해야 하는데 왠지 이 친구가 계속 마음에 걸려 나는 식사를 하는둥 마는 둥하고 근처의 공중전화 부스를 찾아서 다시 그 친구의 가족이 전화를 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전화번호를 하나씩 눌렀다. ‘따르릉’하는 신호가 몇 번 가더니 이윽고 어떤 여자 분이 전화를 받는 것이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였다. 너무나 반가워서 나는 그 어머니에게 그 아이가 대전역에 있으니 빨리 가셔서 데리고 가시면 된다고 말씀해드렸다. 사실 마음 속으로는 감사하다는 인사정도는 들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왠 일 인지 이 아이의 어머니는 잠시 침묵을 한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에서 나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아이가 내 아들은 맞지만 내가 그 애를 데려가야 하나요?’라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고 놀라서 다시 물었다. ‘그럼 엄마가 데려가지 않으시면 누가 데려가나요?’ 한참을 침묵하던 엄마가 이렇게 말을 이어간다. ‘사실 우리 아이가 자동차만 보면 그냥 타고 나가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도 지쳤습니다. 너무 힘들어요.’ 마음 한 켠에는 분노 같은 것도 일었지만 나는 이 어머니를 설득과 비슷한 것을 해서 아이를 데려가라고 이야기하고 알겠다는 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마음이 좀 무거웠다.
다음날 아침 김천에서 대전에 오는 첫 열차를 타고 와서 신학교의 수업을 받기 위해서 급하게 역사를 걸어 나오던 중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어제 그 이이가 거기 그대로 있었다. 어머니가 데리고 가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버스에 승차해서 이상한 기분을 가지고 신학교로 향했다. 수업을 해도 수업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데리고 가지 않았다는 충격보다는 그 아이가 잘못 되면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수업 중간에 조심스럽게 강의실에서 나와서 대전역에 있는 파출소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순경에게 자초지종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찾아 어머니가 올 때까지만 부탁한다는 말을 건넸다. 그런데 거기서 들려온 말은 내 귀를 의심케 했다. 담당자가 하는 말이‘대전역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게 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한 장애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났다.
개인적으로 이 버림받은 아이를 만나게 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서 나를 포함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어떤 사람들을 보면서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편견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장애의 문제는 부모조차 자기 자식을 포기할 수 있게 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그리고 복지기관조차도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도울 수 없다는 것과 국가를 상징하는 경찰의 공권력조차 미칠 수 없는 어두운 것이 있다는 것을 한꺼번에 알게 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나’라는 사람 역시 이런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는 것이다. 내는 이 아이를 도울 수 없었던 무능력자였었고 어떤 면에서는 외면했었다. 그런데 이 장애아이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나의 가슴 안에 미안함으로 남아있다. 나는 이렇게 장애인들을 마음으로 알게 되었고 이 후 특수학교에서 꾸준한 봉사활동을 하면서 지내다가 얼마되지 않는 시간이 지나서 그들을 위한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장애인과 그 가정이 가진 아픔과 나의 무능력에 대한 실망도 잠시 나는 계속해서 장애아동들을 만나는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고 었다. 그 해 겨울에 학교 동아리 친구들이 어느 장애인선교단체에서 주관하는  장애인 캠프에 봉사자로 참여할 것을 제안했다. 이 캠프를 주관한 곳은 현재 내가 몸담고 있는 밀알선교단의 대전 지부인 ‘대전밀알선교단’이었고 이후로 나는 대전밀알선교단 단장님의 권유로 장애인들을 위한 전문적인 사역의 현장으로 부름 받게 된다. 이렇게 1996년 대전밀알선교단에서 장애인선교를 담당하는 간사로서 사역을 시작했고, 이후 3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나를 생면부지의 땅 평택으로 보내셨다. 1999년 12월 15일 평택에 평택과 안성의 장애인들을 품기 위하여 ‘평안밀알선교단’이라는 단체를 창립하여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하였고 이후 안성 지역은 2003년 10월 장애인공동생활가정인 ‘밀알의 집’을 통해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평안’이라는 말은 평택과 안성지역을 줄인 말이다.
평안밀알선교단을 통해서 걸어온 짧은 역사를 말하면 다음과 같다. 1999년 평안밀알선교단을 설립하여 2001년도에 경기도에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했고 이후 계속해서 장애인들을 위한 이미용 봉사와 목욕봉사, 그리고 일반 교회에서 예배하지 못하는 장애인들을 위한 예배를 시작했고, 그들을 위한 전문 캠프 등을 실시해왔다. 이후 2003년이 되어서 안성지역에 건물을 임대하여 ‘장애인공동생활가정’을 개원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이 시설은 공식적으로 평택과 안성지역 최초의 공동생활가정이 되었다. 2004년에는 개인이 운영하던 장애인보호작업장인 ‘꿈이크는일터’가 운영 난으로 폐쇄할 지경이 이르게 되자 당시 운영자는 밀알선교단에게 시설의 운영을 맡아 줄 것을 부탁하였고 나는 그 시설을 맡아서 8명의 장애인들과 정부의 지원 없이 운영하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2006년 사회복지법인이 설립되면서 2007년 평택시에 정식복지시설로 등록할 수 있었고 이 시설은 평택시에서 유일한 최초의 ‘장애인보호작업시설’이 되었다. 이후 2006년도에도 역시 평택과 안성지역에서 최초의  장애아동 전문어린이집인 ‘푸른나무어린이집’을 개원했는데 이 어린이집의개원과 더불어 ‘사회복지법인 평안밀알복지재단’이 경기도로부터 설립인가를 받게 되었다.
후원자와 협력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시민들의 참여와 사역자들의 헌신으로 평안밀알은 장애인들의 복지를 위한 개척자적인 기관들을 많이 세우게 되었다. 현재 평안밀알선교단은 평안밀알복지재단을 포함해 10개 정도의 복지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앞으로의 기대가 있다면 장애인을 섬기거나 약자를 섬길 때 다른 기관들이 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들이 꺼려하는 일을 먼저 하겠다고 나서는 기관이 평안밀알선교단과 복지재단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한 직원의 말처럼 평안밀알은 장애인들에게는 최선이지만 직원들에게는 너무 여락한 곳이라는 고백이 나를 아프게 한다. 미래의 어느 날 고생한 나의 동역자들에게 그 빚을 갚았으면 좋겠다. 벌써 짧은 13년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마지막으로 나의 앞 길을 고민하면서 성탄절을 맞이해 밀알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냈던 밀알 소식지의 글을 통해서 나의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나누고 싶다.



위대하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

친구가 선교사로 파송되어서 목회하고 있는 독일 남부의 레겐스부르크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인구 15만의 이 작은 도시는 과거에는 독일에서 매우 유명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이 도시에는 독일 최초의 석교가 있고, 유럽 최초의 아파트도 있고, 독일 최초의 소시지 집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문호 괴테가 머물고 간 집도 있었고 전설적인 영화의 주인공인 오스카 쉰들러가 숨어 살았던 집도 이 도시에 있었습니다.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였지만 이 도시는 그 자체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있을 정도로 중세의 미학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는 곳 이었습니다. 안식년을 맞은 여행을 하면서 친구가 선교하는 독일 땅을 밟고 친구에게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행하는 것이 참 재미있었는데 나는 이 여행 중에서 몇 가지 마음을 숙연하게 하는 사건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이 도시에는 피터 돔이라는 매우 유명한 중세 성당이 있습니다. 나는 이 성당 근처에 있는 건물 정원에서 매우 흥미로운 조각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매우 오래된 이 조각상에는 오리들에게 다정하게 먹을 것을 주고 있는 수사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오래된 도시의 멋있는 수사를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그림이었지요. 그런데 나의 친구 선교사는 나를 그 조각상의 뒤편으로 이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조각상 뒤편에 새겨진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처음에는 이것이 무엇인가? 라고 생각했는데 좀 더 자세히 보니 수사의 등 뒤에서 늑대의 얼굴이 나와 있고 그 입을 보니 한 마리의 오리가 목을 물린 채 죽어서 늑대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이상한 조각상이어서 나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친구가 찬찬히 설명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조각상은 오리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자애로운 모습으로 먹이를 나누어주는 삶을 살아가는 수사의 모습 속에 숨겨진 늑대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중세시대 성자의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많은 성직자들이 사실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는 성자가 아닌 약탈자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자신들이 돌봐야하는 연약한 사람들을 오히려 핍박하고 갈취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가진 존재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마치 지킬과 하이드 같이 사람의 양면을 보여주는 듯한 이 조각상을 보는 나의 마음은 너무나도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의 조각상으로 인해서 내 스스로의 연약한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뒤 2000년이 지나서 그 분을 따른다고 결심하고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왔지만 사실 내 안에 있는 죄악의 덩어리는 나를 충분히 이 조각상에 나타난 위선적인 모습과 비교해도 못지않을 만큼 악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간다고 말하지만 사실 주님은 내가 위선적이고 때로는 욕심이 지배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그런 존재인 것을 알고 계십니다. 사실 이 번 여행을 통해서 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 있습니다.
“나는 한 사람의 남편으로서 낙제이고, 아이들의 아버지로서도 낙제이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장애인을 섬기는 것 같지도 않고, 계산에 밝으며, 참을성도 없고, 온갖 유혹에도 쉽게 넘어가는 그런 나약한 존재인데, 그런 내가 정말 주님의 일을 하는 목회자의 자격이 있는가? 만약 그런 연약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양들을 목양해야 한다면 사람들은 왜 나를 목회자로 인정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위선을 상징하는 하나의 조각상을 보면서 나는 겸손하게 여러분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혹시 당신의 삶도 이 동상과 닮은 면이 없지는 않았는지......
나는 이 동상을 보고나서 바로 근처에서 오스카 쉰들러가 숨어 살았던 집 앞을 지났습니다. 유태인들이 가스실로 들어가 죽는 학살을 막기 위해 살았던 독일인 그는 초라하게 죽어갔지만 그런 실천적인 믿음의 사람이 있어서 지금 우리 삶에 안식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탄절의 계절에 철저하게 따듯한 삶을 사셨던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이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함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평안밀알선교단/복지재단 대표 한덕진목사

이 글은 제가 걸어 온 길에 대해서 사회복지협의회에 보낸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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