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7-17 23:55
천국을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가 감동을 받으며 읽고 문학적 감동을 받아 글을 쓸 수 있을만한 성경구절, 그리고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같은 사람이 깊은 감동을 받으면서 사람들에게 그 감동을 전해주기 위해서 펜을 잡을만한 성경구절이 있다면 어떤 구절일까?
나는 ‘산상수훈’이라고 알려진 몇 구절의 성경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의 샘에서 한 그릇 시원한 생수한 그릇을 마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가장 뜻있는 설교의 으뜸 중에 하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산상설교일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설교하신 산상설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가 기록되어있음은 물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팔복’에 대한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나는 이 말씀 중에서 아래에 있는 부분을 읽으면서 생수같은 감동을 얻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누가(악한 사람이)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아라." [마태복음5:38-42, 공동번역]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것은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키는 율법이었다. 더불어서 이 법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공통적으로 적용하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적용한 당연한 내용의 질서 체계였다. 만약 나에게 잘 못한 사람을 이렇게 다 용서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조차 지키지 못하고 내어주는 사람들만 사는 세상이 있다면 이 세상은 반드시 모든 질서가 파괴되고 악이 성행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악한 사람이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을 돌려대어 받아주고, 재판을 걸어서 속옷을 가져가려는 사람에게 겉옷까지도 내어주라고 말씀하신다. 하물며 권력자들이 징병을 하여 오리를 억지로 가라고 해도 십리까지 함께 가주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저항 의식’의 발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어서 말씀하신다. 권력자나 악한 사람이 아닌 어떤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에도 자신의 것을 나누어주라고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뺨을 맞으면 억울해서라도 한 대 후려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정인데 어떻게 그것을 참으라고 말씀하시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가 없었다. 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생각하던 끝에 나는 이 말씀을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았더니 그 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의 악한 자들과 또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착취에 대항하는 말씀이 아니라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 천국을 세상 사람들에 보여 줄 수 있는가’에 대한 말씀이었다.
몇 년 전 평택의 어떤 교회에서 밀알의 장애인들을 초청해서 함께 설교를 나누고 음식을 나누었던 적이 있다. 당연히 나는 밀알의 단장으로서 교회에 도움을 청했고 그 교회의 목사님은 밀알의 돕기 위해서 우리를 불러서 교회에 선보인 것이었다. 이렇게 교인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낸 후 장애 단원들과 함께 집에 돌아오려고 하는 중에 교회의 목사님이 나를 잠간 부른다. ‘후원금을 주실 모양이다.’라고 생가하곤 잠시 서재에 들렀다. 생각처럼 목사님이 봉투를 건낸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보니 봉투가 한 개가 아니고 두 개였다. 그래서 ‘왜 두 개냐?’고 물었더니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하나는 밀알에 후원금으로 하시고 나머지 하나는 목사님의 생활비에 보태서 쓰라는 것이었다. 나는 하나만 기대했는데 교회에서는 장애인 사역하고 사례비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목사를 염두에 두고 두 개의 봉투를 일부러 준비한 것이었다. ‘목사님 저한테는 안주셔도 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얼떨결에 봉투 두 개를 모두 받아 나오는데 목사님 서재 앞에 그 교회 교인이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 분이 나에게 하는 말씀이 ‘목사님 제가 조금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요.’라고 말하면도 장애인을 위한 헌금봉투 하나를 또 건낸다······. 그날 나는 거기서 천국을 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를 달라고 하는데 두 개를 주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무식한 사람이고, 이미 잘 살기는 틀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님은 천국을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에게도 일부러 당해주면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이고 무엇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그것보다도 더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해주고 계신 것이었다. 이 말씀의 요지는 ‘천국을 사는 사람’을 세상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라는 것이다.
아마도 ‘천국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서 톨스토이는 ‘바보 이반’이라는 책에서 ‘착하기만 하고 어리석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도 행복하게 사는 비현실적인 이반이란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며,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라는 책에서 마리엘 주교를 배은망덕하게도 자신의 은 접시를 훔친 ‘장발장’에게 도리어 은촛대까지 선물해줄 수 있을 만큼 어리석은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이 모든 작품들은 이미 천국을 사셨던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실제로 세상의 모든 악한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용서의 기도를 드림으로 그 모본을 보이셨다.
나는 만약 어떤 사람과 함께 이웃하고 싶냐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하나를 요구했는데 두 개를 주면서 걱정해줄 수 있는 사람’선택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반대로 나에게 ‘하나를 요구했는데 두 개를 주면서 도리어 걱정해줄 수 있는 이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직도 멀었다고 하면서 어디 구석에 숨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염치없게도 장애인들을 위해서 하나를 달라고 하면 두 개를 주면서 기도까지 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