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5-19 13:56
사랑은 약함을 따라 흐르는 것입니다.
오늘 불연듯 지난 몇 년 전 있었던 딸에 대한 생각이 났습니다. 어느 날 밤 둘째 딸이 갑자기 배가 아프고 열이 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약을 먹으면 낳을 수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소화제도 먹여보고 해열제도 먹여봤는데 시간이 지나도 배는 더 아프고 열은 내릴 줄을 몰랐습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늦은 시간까지 계속해서 아프니 걱정이 태산이 되었습니다. 점점 더 아픈 것이 더해지면서 나는 늦은 시간에 어린 아이를 업고 늦은 시간까지 운영을 하는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아파하는 아이를 등에 업고 병원으로 가는 동안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노심초사했는데, 병원에 도착하니 그 늦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진료를 받으러 왔던지 아이의 순번을 받고 기다리는 시간에 아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너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세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이들에 대한 편애를 하는 것은 부로로서 해서는 안될 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세 아이 모두에게 똑같은 사랑을 주기 위해서 노력을 했었습니다. 모두가 사랑스러운 자식이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나는 놀라운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이 별 일 아닌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그 순간에 만큼은 둘째에 대해서 편애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아이를 등에 업고 차에 태우고, 의사를 기다리고, 링거를 맞는 때를 지나서 고통이 사그러 들 때까지 나는 아내에 대한 생각도 그리고 집에 두고 온 두 아이에 대한 생각도 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아! 부모도 자식에 대해서 편애를 할 수 있구나!’ 아니 ‘할 수 밖에 없구나~’라는 깨달음은 나에겐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둘째를 편애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아이가 예뻐서도 아니고 말을 잘 들어서도 아니었습니다. 단 한 가지 이유는 둘째가 너무 아파하고 있고 아빠가 아니고는 도울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다른 모든 자식들보다 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아기가 바로 둘째였습니다. ‘아 사랑은 나이를 따라 흐르는 것이 아니라 약함을 따라 흐르는 것이구나!’ 바로 사랑이 흘러야 하는 곳은 약한 것을 가진 곳이라는 사실을 그제서야 몸으로 체득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왜 그렇게 장애인들과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 그리고 죄인들과 세리들, 어린아이들과 과부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에 대해서 그제서야 제대로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절실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환자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도 그들이 당하고 있는 아픔과 고난을 해결해 줄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편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그렇게 보호해주고 싶어 하셨고, 그렇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시고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까지도 ‘약자’라고 하는 사람들과 극성맞도록 함께 하셨습니다. 나는 그제서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낮은 곳이 아니라 약한 곳을 향해서 흐르는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부모의 사랑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다른 자녀들을 사랑하지 않느냐고요? 아닙니다. 똑같이 사랑합니다. 하지만 더 아픈 자식에 더 많은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낮은 곳으로, 그리고 약한 한 곳으로 흘러 내려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나는 지금 둘째 딸을 통해서 깨닫게 된 사랑을 원리대로 낮은 곳, 약한 곳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장애인들보다 더 힘들고 더 어렵고 더 아파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장애인들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