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4-20 10:46
사월의 부활을 향한 몸부림
겨울을 지내고 계절의 여왕인 봄철이 다가 왔다. 만물을 생장을 시작하고 새들은 지저귀고 녹음을 더해가는 4월은 행복과 기쁨이 묻어난 계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 우리의 짧은 역사는 4월이 가지는 이미지를 생명과 소생보다는 잔인함의 이미지로 각인해 온듯하다. 4월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비극적인 일들이 많이 발생한 달로 꼽힌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암리 학살사건, 419형명, 긴급조치7호, 제주4.3사건이 4월에 발생했고, 인권운동과 노동계의 춘계투쟁 등이 매년 이 시기에 되풀이 되어왔다. 그래서 화려함 보다는 생존을 위한 투쟁의 계절로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세계적으로는 링컨대통령의 암살, 흑인 인권운동가였던 루터 킹 목사의 암살이 미국의 4월에 일어났으며. 1912년 4월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충돌해 1500여명이 목숨을 잃는다. 구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방사능 유출 사고도 공교롭게 4월에 발생했다. 여기에다가 최근 발생한 세월호 침몰의 사건을 생각하면 정말로 우리에게 4월은 비극의 달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을까? 정말로 4월에만 잔인한 사건들이 겹쳐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소생의 계절이요 생명의 계절인 사월을 이토록 모욕한 사람은 누구일까? 엉뚱하게도 4월을 잔인한 계절로 만든 장본인은 시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이다. 실제로 엘리엇의 시 이전의 모든 시인들을 사월을 칭송함으로 노래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는 사월을 잔인하다고 말했는가?
엘리엇이 살았던 시대는 1900년대 초기의 시기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 시기는 전 세계를 우울하게 할 만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이 바로 세계1차 대전이었다. 유럽의 진보된 사상 속에서 산업기술의 혁명적인 발전의 힘으로 치러진 이 전쟁으로 유럽에서 죽어나간 군인들의 숫자만 900만명에 이르렀다. 맹목적인 종교와 권위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인간의 이성을 찾아가기 시작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에로의 흐름과 산업혁명 등은 인간이 가진 무한한 잠재성과 장밋빛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행복한 사람들의 상상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1914년 그렇게도 합리적인 사람들이 서로의 정치와 사상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대 참사를 일으키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수많은 생명이 생명을 잃었다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자신들의 문명의 생각에 갇혀서 이렇게 큰 고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어떤 평론가의 말처럼 엘리엇은 ‘스스로 만든 재앙의 굴레를 자신의 머리에 쓴 사람들의 죽은 영혼을 해부하고’있었던 것이다. 엘리엇이 볼 때 그의 절망은 ‘자신들이 격고 있는 그 절망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정신적인 황폐함’이었고 이런 절망의 상황 속에서 유럽의 모든 사람들의 정신적 황폐 때문에 삶의 재생과 부흥을 위한 일말의 기대도 찾을 수 없는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다.
지금 우리는 세월호의 비참함을 온 국민이 겪고 있으며, 장애로 인한 고통을 모든 장애인과 가족들이 몸으로 겪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에 급급해서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에는 신경쓸 여유가 없다. 이 사회가 점점 더 어두움으로 흘러가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그런 때를 살고 있다는 것도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가진 상처들은 과연 아물 수 있을 것인가?라고 모두들 묻지만 아무도 자신하지 못하는 불확실한 때를 사는 사람들의 삶은 너무나도 지쳐있고 불안해 있다.
유럽의 정신적 황폐함 속에서 어떤 해답도 찾지 못했던 시인 엘리엇.
그러나 그는 그러한 황폐함 속에서 자신의 시의 제목인 ‘황무지’에 새로운 소망을 향한 생명들의 몸부림을 향하여 잔인함이라고 부른다. 겨울의 눈이 대지를 덮어 씨앗의 생명을 보호해주었으나 진짜 생명을 향한 몸부림은 따듯한 봄바람이 불면서 부터인 것이었다. 한 톨의 씨앗의 생명을 띄우기 위해서 딱딱한 껍질과 대지의 표면을 극복해야하는 것처럼 지금 당하는 우리 모두의 죽음과 같은 고통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네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뿐.....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 단지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중략)” (T.S 엘리엇. 황무지 중에서)